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얀 후스 (문단 편집) == 후스파 == [include(틀:개신교 주요 교파)] [include(틀:신성 로마 제국)] 얀 후스에게 가해진 부당한 처사를 본 보헤미아인들은 공포를 느꼈으며, 공포는 곧 분노가 되었다. 그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던 츠비네크 대주교는 그들을 피해 [[프라하]]에서 도망쳐야 했으며 1415년 가을, 보헤미아 왕국의 귀족들은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을 거부하는 결의문을 발표하였다. 공의회의 결정을 거부한다는 것은 곧 [[가톨릭]]에 반기를 든다는 뜻이었다. 후스파 일원들은 후스가 그랬듯이 성만찬에서 평신도에게도 포도주를 주었다. 성경대로 살 것을 다짐한 후스파의 수는 날이 갈수록 늘어났고, 가톨릭의 탄압도 후스파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. 1419년, 강경 후스파들이 동료 후스파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의원들을 창문 밖으로 내던지는 1차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[* 일반적으로 주로 이야기되는 프라하 투척 사건은, 1618년 발생하여 [[30년 전쟁]]의 시발점이 된 2차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이다.]이 발생했고, 얼마 후 후스파는 보헤미아 왕국의 흐름을 주도하는 세력이 되었다. 그러나 후스파는 단일한 세력이 아니라 얀 후스에 대한 지지를 기반으로 성립된 연합체였기에, [[가톨릭]]에 대한 태도를 놓고 온건한 개혁을 추구하는 양형파(utrakvisté)와 과격한 타보르파(táboři)로 분열되었다. 타보르파는 [[얀 지슈카]]를 중심으로 활동하여 [[후스 전쟁]] 기간 4차례에 걸친 가톨릭 십자군에 맞서 전설적인 전적을 세웠지만, 그가 죽은 뒤 구심점이 사라져 타보르파[* 얀 지슈카의 사망 후 그의 후계자로 프로코프가 있었으나, 그 역시 전투 중 전사하고 말았다.]는 1434년 [[리파니 전투]]에서 양형파-가톨릭 연합군에게 대패했고, 1437년에는 잔존 병력들도 가톨릭 측에 항복하고 마지막으로 남은 [[폴란드 왕국|폴란드]]의 후스파도 1441년 패퇴하면서 타보르파는 소멸하고 만다. 한편 양형파는 1436년 [[가톨릭]]과 평화 협정을 맺어 교황과 보헤미아 국왕에게 순종하며 가톨릭 의식을 받아들이되, 성찬식에서 빵과 포도주를 모두 받는 기존 후스파의 방식은 인정하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다. 후스파는 이렇게 1620년경까지 존속되었으나, [[30년 전쟁]]의 백산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하면서 후스파에 대해서도 강력한 압박이 가해졌다. 골수 가톨릭이었던 [[페르디난트 2세]]는 양형[[영성체]]를 허용하던 기존의 권한을 폐지시키고 [[개종]]하거나 보헤미아를 떠나라는 칙령을 내렸다. 이후 후스파는 지하로 숨어 들어갔고, 이 때문에 시골 지역에서는 낮에 가톨릭 [[미사]]를 드리고, 밤에는 [[개신교]] [[예배]]를 드리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. 후일 [[요제프 2세]] 때 기독교 종파의 자유를 보장하는 칙령이 반포되고 나서야 후스파는 다시 양지로 나오는 것이 허락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